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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3. 23世 〉26. <부정공>성암공휘동집묘갈명(省菴公諱東鏶墓碣銘)
1. 문헌 목록 〉23. 23世 〉28. <부정공>취헌거사휘석인묘갈명(翠軒居士諱晳仁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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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부정공>덕헌공휘재옥(동옥)행장(德軒公諱在玉(東玉)行狀)
덕헌공휘재옥행장(德軒公諱在玉行狀) 공(公)의 휘(諱)는 재옥(在玉)이요 호(號)는 덕헌(德軒)인데 옥천인(玉川人)이다. 공은 단종(端宗)의 절신(節臣)인 절민공(節愍公) 휘(諱) 숭문(崇文)의 十四세손인 휘 이섭(利涉)이 증조(曾祖)인데 증, 통훈대부(贈通訓大夫) 호조좌랑(户曹佐郎)이며 증, 통정대부(贈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좌부승지(左副承旨)인 휘(諱) 정규(楨奎)가 할아버지이다. 생부(生父)는 휘(諱) 來烈이고 생모(生母)는 양성이씨(陽城李氏)이다. 공(公)은 휘(諱)가 백열(伯烈)이요, 자(字)는 종선(宗善)인 큰 아버지에게 입양(入養)하였다. 양모(養母)인 정부인(貞夫人)은 경주(慶州) 정환일(鄭煥日)의 딸로 十九세에 조문(趙門)에 들어와 시부모를 섬겨 효도하였으며 一八八六年(丙戌)에 남편이 독진(毒疹)을 앓아 백약(百藥)이 무효(無效)하여 위독하게 되자 대신 앓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빌었으나 운명(殞命)하자 따라 죽으려 하였다. 그러나 시부모(媤父母)의 권유로 정신을 가다듬고 장례(葬禮)를 치른뒤 종질(從姪) 재옥(在玉)을 입양하여 소생(所生)처럼 길렀으며, 시아버지, 시어머니 기일(忌日)이면 아침 일찍 일어나 목욕제계(沐浴齋戒)하고 집안을 청결히 한뒤에 손수 제수(祭需)를 마련하여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감복(感服)하였고 이 사실이 읍지(邑誌)에 실려 있으며 인덕(仁德)마을 앞에 정열문(貞烈門)을 세워 기리고 있다 公은 舊韓末 고종 一八九六年 丙申 陰正月二十五日에 인덕마을에서 태어났다. 가정에서 한학(漢學)을 수업(受業)하여 양부모(養父母)와 친부모(親父母)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友愛)가 돈독(敦篤)하였으며 친구사이에 신망(信望)이 두터웠다. 굳세고 바르고 독실(篤實)하신 큰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성품(性品)이 대쪽 같이 곧고 주장이 뚜렷하며 한번 옳다고 믿고 일을 추진하면 어떤 어려움이 부딪칠지라도 굽힘없이 추진하여 유종(有終)의 미(美)를 거두곤 하였다. 그럼으로 많은 사람들이 공을 조심하여 존경하였다. 一九三一年부터 一九三九年까지 무려 九個年間 순천군 도사면(道沙面) 면장을 역임하면서 그 선정(善政)의 공(功)이 면민들의 존경을 받아왔다. 그리고 공(公)은 구세조(九世祖)인 계공랑공(啓功郎公) 휘 계형(繼珩) 선조(先祖)의 제각(祭閣)을 주암면 원동마을 위에 위치한 묘소(墓所) 앞에 건립한 것을 평소(平素)에 염원(念願)하여 오다가 一九四七年에 종친(宗親)들의 의견을 모아 결의(決議)하고 성금(誠金)을 모아 공사를 시행하면서 특히나 엄동(嚴冬)인데도 현지에서 선두지도하여 공사를 완공(完工)하고 이곳 원동(院洞)에 산이 보듬고 물이 돌면서 가래나무와 잦나무가 울창한 곳에 제각(祭閣)을 세웠다 하여 僾然齋라 懸版하여 오늘에 보존(保存)되고 있으며, 一九六六年에는 절민선조(節愍先祖)의 신도비(神道碑)와 충절비(忠節碑)를 건립(建立)하는데 경제적(經濟的), 지역적(地域的)인 어려움에 종중(宗中)의 의견조정(意見調整)과 사업추진(事業推進)에 헌신적(獻身的)인 노력(努力)을 寄與하였다. 공(公)은 一九五四年부터 유도회(儒道會) 순천지부(順天支部)에서 각급 임원(任員)을 역임하여 오면서 一九七一年에는 유도회 회장(儒道會 會長)에 선임(選任) 되었다가 一九七三年 재선(再選)을 계기로 이대(二代)를 재임하면서 우리 사회(社會)에서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가 사라져감을 안타깝게 여겨 도덕성(道德性) 회복운동(回復運動)에 역점을 두고 유림(儒林)은 물론 지역사회에서 계도와 홍보에 남달리 솔선하여 유학(儒學)의 기풍(氣風)을 진작(振作)한데 심혈(心血)을 기울였다. 一九七四年에는 성균관(成均館)에서 전의(典儀)에 임하였으며 순천향교(順天鄉校) 도유사(都有司)에 수망(受望)도 하였다. 공(公)은 一九七九年 기미(己未) 음력 七月 二十四日에 八十世세를 일기(一期)로 세상을 뜨셨는데 묘(墓)는 인덕(仁德) 중승곡(中僧谷) 상록(上麓) 묘좌(卯坐)벌에 있다. 배위(配位)는 통정(通政)인 경주(慶州) 정관열(鄭灌烈)의 딸로 一八九五年 八月 十七日에 태어나 조문(趙門)에 들어왔으며 一九三三年 계유(癸酉) 三月 二十一日에 돌아가시고 계배(繼配)는 여천군 소라면 광주인(廣州人)이 병상의 딸로서 一九○七年 六月 二十九日生인데 一九九四年 三月 二十九日에 돌아가시니 효부(孝婦) 시모(媤母)님의 가르침을 이어받어 祖上에 엄숙하고 부모(父母)에게 효도(孝道)하는 엄한 가정교육(家庭敎育)으로 家事를 이어왔다. 슬하에는 아들 봉훈(俸勳) 승훈(承勳) 중훈(重勳) 경훈(京勳) 정훈(正勳)으로 오형제인데 승훈(承勳)은 종조부(從祖父)인 래열(來烈) 앞으로 출계(出系)하였다. 딸은 넷을 두었는데 사위는 김해인(金海人) 金白先 연안인(延安人) 이의봉 광산인(光山人) 李其柱 문화인(文化人) 柳志墉이다. 공(公)은 이처럼 일생을 사회(社會) 봉사(奉仕) 활동(活動)과 종사(宗事)에 정성스러웠고 조상을 섬기고 가문을 빛내는데 종친에게 모범을 보여줘 공의 이러한 정신은 현대인이나 종친들에게 거울이 될 뿐만아니라 후예들이 본받을 바가 많아서 이를 추모(追慕)하는 마음으로 위와 같이 행장을 간략하게 서술한다. 一九九八年 九月 상순 족질(族姪) 철훈(哲勳) 삼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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